[커버스토리]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은 섬나라···통일 땐 국민들 사고지평 넓어질 걸요”

통일통합 관리자님 | 2020.01.21 11:20 | 조회 709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커버스토리]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은 섬나라···통일 땐 국민들 사고지평 넓어질 걸요”

한국인 다수는 ‘분단’에 내성이 생겼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도,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주민이 굶주린다는 뉴스를 보아도, 내 일이라고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분단을 몸과 마음 깊은 곳까지 느끼는 3만여명의 사람들이 있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탈북민들이다. 고난의 행군 시절 배고픔을 못 이겨 온 사람도 있고, 자유와 기회를 열망하며 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비국민’ 취급을 받는다. 이들에겐 남한 주민들을 향한 ‘감사한 태도’만이 용납된다. 천대와 멸시 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이들, 제3국으로 떠난 이들도 있다. 분단 체제는 탈북민에 대한 폭력적 시선의 근원이다.

탈북민들은 남과 북을 모두 겪으며 생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자, ‘분단의 증언자’다. 탈북민들 대다수가 극우보수일 것이라는 통념은 정치권이 만들어낸 ‘착시’다. 한국사회는 진영논리에 따라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취사선택했다.

2000년대 초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주승현씨(38·사진)는 탈북민 최초의 통일학 박사다. 그가 올해 초 펴낸 책 제목은 <조난자들>이었다. 남북의 격차, 격동하는 세계정세가 만들어낸 파도 위에서 주씨와 탈북민들은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돌았다. 주씨는 분단 극복을 인생의 과제로 생각한다. 남에 내려와 죽기 살기로 공부한 것도 이 과제를 위해서였다. 주승현씨가 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분단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인생, 그의 감각, 그의 생각을 프리즘 삼아 지금 한반도가 맞은 해빙기를 바라본다.

그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북녘 땅이 내다보이는 임진각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그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북녘 땅이 내다보이는 임진각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가 말하는 ‘경계인의 삶’

소년은 골목대장이었다. 일곱살에 친구들을 꾀어 집에서 네시간 거리의 대도시 구경을 나갔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주변 학교 패거리들과 치고받다가, 화해하면 ‘의형제’를 맺었다. 공부는 못했지만 소년을 아껴주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열일곱 무렵에는 선생님이 술을 가르쳤다. 술자리에서 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말고 너의 믿음을 믿어라’와 같은 말은 지금도 그의 가슴에 남아있다.

북한의 심리전 방송요원으로 근무하던 23살, 그는 비무장지대에 촘촘히 박힌 지뢰와 고압전선을 피해 경계를 넘었다. 이후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사람이 됐다. 처음 취직했을 때 그는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지만, 더 적은 월급을 받았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자신의 ‘출신’을 숨기려 노력했다. 그 역시 자신의 말투를 접한 상대의 묘한 표정이 견디기 힘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발음 연습을 하던 날, 설움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쏟았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출전(2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선언(4월27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북·미정상회담(6월12일), 지난달 19일의 평양공동선언…. 2017년 떠돌던 전쟁위기설이 무색할 정도로 한반도는 해빙무드가 완연하다. 주승현 박사를 지난 23일 경기도 오산 한신대학교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인천대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초빙교수(통일 통합연구원 상임연구위원)로 재직 중이다.

■ 남한에 온 후 잉여인간이 되었다

약속시간 10분 전에 약속장소인 대학 강의실을 찾았다. 그는 홀로 앉아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언젠가 한 교수가 기자에게 ‘상식’이라는 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탈북민들의 시간관념은 엉망이다.’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군 출신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30분~1시간씩 일찍 약속장소에 가 있는 것이 습관이 됐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이곳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켜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초창기 동료에 정착금 뺏기고
고된 일 남보다 더 많이 했지만
비국민 취급에 월급은 더 적어
살아남아야겠단 절박함에 공부

남북정상 분단선 넘는 데 5~6초
‘분단,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생각
판문점선언 키워드 ‘번영’에서
통일접근법 변화 실감해

그는 한국에 온 후 10년 만에 박사모를 썼다. 시험기간에는 1주일에서 열흘 내리 도서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워서 자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 대학 등록금을 위해 전단지 알바, 호프집 종업원, 건설현장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휴학 한번 하지 않았다.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 같은 것 때문이었어요. 학업을 선택했는데 이걸 포기하면 다른 것은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두려움도 컸어요. 중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요.”

[커버스토리]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은 섬나라···통일 땐 국민들 사고지평 넓어질 걸요”

인간 주승현의 23살 이후의 삶은 “혹독하게 시리고 궁핍했다”. 외로움에 사무치던 초창기, 가족처럼 도와주던 동료 탈북민은 주승현의 정착금을 가져간 후 연락을 끊었다. 남한 사람들은 그에게 엉터리 휴대전화와 물건을 팔며 돈을 뜯어갔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도 힘들었다. 북한에서도 굶지 않았던 그는 남한에서 처음 굶어봤다. 군에서 배운 독도법으로 지리를 익혀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일식당에 처음 취직했을 땐 고된 일을 마다 않고 남들보다 하루 네시간씩 더 일했는데 월급은 50만원 적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은 순탄치 않았다. 서류전형에서만 100번 가까이 떨어졌다. 지원서에 ‘탈북민’의 흔적을 지우니 서류전형 합격 통보가 줄줄이 날아들어 착잡해진 적도 있다. 곡절 끝에 취직을 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한 뒤 석·박사과정을 밟으려고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분단·통일을 연구하기로 다짐한 자신과의 약속을 끝내 지켜 박사학위까지 따냈다.

한국인들은 잔인할 정도로 ‘사회 부적응자’를 금세 알아챈다. 눈빛, 말투, 걸음걸이, 행색 어느 것 하나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자신들과 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박정범 영화감독은 <무산일기>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한 탈북민을 직접 연기했다. 질식할 것 같은 표정, 움츠러든 어깨, 어색한 걸음걸이, 허름한 행색, 답답할 정도로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고 견디는 태도를 연기했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2000여명에 이른다. 한때 주승현씨 역시, 아니 어느 탈북민이라도 <무산일기>의 주인공처럼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초조한 표정으로 당신의 곁을 지나갔을지 모른다.

<조난자들>에는 ‘조난’ 끝에 끝내 세상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북한의 일류대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한 한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취업에 번번이 실패했다. 배우자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목을 맸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한 탈북민은 아내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왔고 공사장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치료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2016년 그는 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13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가 숨진 후 발견된 일기장엔 “편법이 용납되는 결과주의와 일등주의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 왔던 많은 탈북민들이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천대”에 외국으로 떠나가기도 한다. 차별에 대해 얘기할라치면 ‘북으로 돌아가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직장에선 ‘김정은에게 그렇게 배웠냐’는 이상한 조롱도 견뎌야 한다. 때로 우리는 그들을 일컬어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른다. 주 박사는 ‘이런 통일이 우리의 미래이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준비없이 통일을 하다간 끝없이 비용만 들어가고, 갈등하고 적대하고, 심지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학부 전공수업 때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독일 통일 사례를 얘기하죠. 그런데 그 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을 선택한 통일’이에요. 서독이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있었죠. 서독에선 ‘탈동독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포용력과 성숙함이 있었어요. 우리는 독일 사례를 말하면서도 독일을 공부하지 않아요. 탈북민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북한주민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잖아요.”

■ 평화와 통일 사이 ‘번영’

올 한해 한반도 냉전의 벽은 조금쯤 녹아내렸다. 남북의 분단체제를 모두 겪은 탈북민으로서 올 한해 가장 설렜던 ‘역사적 장면’을 물었다. “판문점에 그어진 분단선을 문재인 대통령이 넘었던 순간”이라고 했다. 세계가 놀란 광경이었으니, 그가 이 장면을 꼽은 건 의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제가 비무장지대를 건너 남한으로 오는데 25분이 걸렸어요. 당시로선 최단시간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5년 전에 그 기록이 깨졌어요. 개성의 북측 검문소에서 남측 검문소로 뛰어온 탈북자가 있었어요. 2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귀순한 이는 14초가 걸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두 정상이) 분단선을 넘는 데 5~6초가 걸렸어요. ‘분단은 이런 식으로 무너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연구자로서 그는 판문점선언의 키워드 ‘평화, 번영, 통일’에 주목했다. 판문점선언은 정확히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이다.

“통일접근법의 변화가 담긴 표현이었다고 생각해요. 보수와 진보는 통일접근법이 반대였어요. 보수는 ‘선통일 후평화’를 얘기해 왔죠. 북한 정권이 없어지지 않으면 평화는 있을 수가 없다는 논리였잖아요. 반대로 진보진영은 ‘선평화 후통일’을 얘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평화와 통일 사이에 ‘번영’이 들어갔어요. 점진적·단계적 평화와 통일의 중간단계로서 ‘공동의 번영’을 생각한 거죠.”

- 보통 탈북민들은 극우보수의 시각으로 북한문제를 바라보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탈북민들이 남한사회를 보는 태도와 시선이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어요. 탈북민 하면 ‘극우 앞잡이’로 생각하는데 실은 견해가 다양합니다. 특히 청년세대는 훨신 유연해요. 많은 탈북청년들이 2016~2017년 겨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 참여했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진보적인 탈북청년들이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판’이 깔릴 수도 있겠다는 기대였어요. 이들은 극우보수가 탈북민들을 이용하는 걸 알고 있고,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 기대가 좀 수그러들었나요.

“정부가 탈북민 기자의 남북고위급 회담 취재를 불허한 것을 보고 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자로서 제 생각의 ‘기준점’은 헌법인데,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에 위배되잖아요.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어긋나고요. 탈북민들에게 ‘너희는 국민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얘기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사건은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북한인권, 진보·보수는 대화부터 하길

그동안 한국사회는 탈북민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않았다. 그들이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말하면 보수진영만 귀를 기울였다. 남한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소수자로서의 삶을 얘기하면 진보진영만 주목했다. 둘다를 얘기하면? 혹은 북한정권은 비판하면서도 인도적 지원을 찬성하면? 탈북민의 그런 말은 이 사회에서 대답없는 ‘메아리’다.

탈북민들을 ‘환대’한 이들이 보수진영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극우보수진영은 그들의 ‘증언’을 지렛대 삼아 남북긴장을 부추기는 반북감정을 자극했다. 그 결과 ‘탈북민=극우보수’의 도식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탈북민들의 얘기에 귀를 닫았던 진보의 책임도 있다. 그는 “탈북민들이 단지 돈 5만원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에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탈북청년들은 몰라도 탈북 어르신들은 철저히 소외돼 있어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반겨줄 때의 그 마음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 탈북민으로서, 정치외교 학자로서 진보, 보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보수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올 초까지만 해도 전쟁 분위기였습니다. 전쟁의 위험이 가시고 비핵화가 진행되고 있다면 지지를 보내는 게 마땅합니다. 독일의 동방정책(통일정책)은 정권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계속 흔들어요. 진보에게는 ‘언제까지 탈북민을 외면할 거냐’고 묻고 싶습니다.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면 탈북민, 북한인권, 국군포로 등의 사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성취했고 그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아직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지금이 그 ‘때’라고 봅니다.”

남과 북의 가을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남과 북의 가을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3일부터 7박9일의 유럽순방을 다녀왔다. 유럽사회는 한국의 진보진영보다 북한인권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본다. 문 대통령은 프랑스 르 피가로지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개선이 더욱 긴밀한 남북협력을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최근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북한과의 교류·협력 강화가 북한 주민의 실질적 인권 개선에 실효성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외의 나머지 답변은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적극 동참해오고 있다”는 정도의 원론적 수준에 그쳤다.

- 북한인권 문제를 남북대화의 테이블에 올려야 할까요.

“사실 이제까지 북한인권 문제는 진보·보수 간 정치적 도구, 정쟁의 수단이었습니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권(시민의 정치적 자유)을 강조하면서 대북강경책과 북한붕괴 수단으로 삼으려 했고, 진보는 생존권과 사회권을 강조하면서 식량지원과 교류협력으로 풀자고 해 왔습니다. 북한인권 문제가 인권이 아닌 이념의 문제로 부각된다면 남북관계의 동력을 상실할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먼저 북한인권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대화와 합의가 선행돼야 합니다. 대화의 중심은 ‘인권은 민주주의의 척도’라는 점이 돼야 하고요.”

■김정은을 믿을 수 있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 분계선을 넘고, 농담을 하고, 웃는 장면을 지켜보며 대다수가 설렜을 것이다. 또 일각에서는 ‘김정은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으며 ‘좋아할 때가 아니’라고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육자이기도 한 주 박사에게 대중적인 어법의 설명을 부탁했다.

“지금 우리는 선(분단선)을 지우고 있어요. 지금 공동경비구역에서 이미 선을 지우고 있죠. 반경 400m 구간의 선을 지우는 데 73년이 걸린 거예요. 하지만 나머지 155마일엔 여전히 선이 그어져 있죠. 선을 지우고, 통일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거고요.”

- 일부 보수진영이나 국제사회 일각에선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근본적 이유들이 있다고 봅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한 제2의 고난의 행군 가능성, 트럼프 집권 후 미국의 대북 군사공격 가능성이 높아진 점, 핵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협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포함), 김정은 정권의 경제발전 의지….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 평화롭게 공존하며 왕래만 해도 충분하지 않으냐는 이들도 있습니다. 통일을 해야 하나요?

“왕래와 교류가 활발해지면 아마 국민들도 통일하자고 할 겁니다. 지금의 한국은 섬나라잖아요. 경제·상상력의 측면 모두 섬나라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통일하면 분단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고의 영역이 확 넓어질 겁니다. ‘미래의 먹거리’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쌓아뒀던 기업들이 투자처를 못 찾고 있었습니다. 당장 도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일자리가 생겼어요. 마지막으로 통일은 미래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사명입니다.”

주 박사는 요새 MBA 과정을 시작했다. 또 ‘공부’다. “남북 간의 경제적 불균형이 북한주민과 남한주민 간의 화합과 상생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경제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해빙기를 맞은 지금 그는 “남북한의 경제적 문제로 인한 갈등과 충돌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을 추가했다. 이번에도 박사과정까지 밟고 싶다고 한다. 이쯤 되니 분단과 통일, 한반도라는 이슈를 다 떠나, 주 박사야말로 ‘노력의 화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버스토리]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은 섬나라···통일 땐 국민들 사고지평 넓어질 걸요”

- 한국 청년들은 경쟁과 노력에 지쳐 있습니다.

“대학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북한에서는 의무복무기간이 13년(현재는 10년)이었는데 나는 그중 6년을 하고 왔다. 2년 까짓거 별거 아니지 않으냐. 밥도 주고 월급도 주지 않느냐.’ 근데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남한사회에서 자랐다면 1년도 못 버텼을 겁니다. 숨 막히게 경쟁하며 자란 학생들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북한 땅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었다. 고향인 함흥과 근무지였던 개성의 비무장지대는 예상한 답변이었다(함흥에서조차 함흥냉면은 유명하지 않으며 슴슴한 맛이라고 한다). 세번째가 의외였다. 북한에서도 안 가본 김책시를 가겠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원 동기 중 한명이 “탈북 선택을 잘못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는데, 그의 고향이 김책시였다. 김책시는 원래 ‘성진시’로, 도시 코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친구가 고향 노래를 부를 때면, 그는 가보지도 않은 그곳이 덩달아 그리웠다. 김책시 출신의 그 친구는 어느 날 고향 생각에 서해에 놀러 갔다. 대학 시험기간이었다. 친구들은 시험이 끝나는 대로 따라가기로 한 터였다. 도착해 보니 그는 죽어있었다. 익사였다. 그때 네명의 하나원 친구들과 약속했다. 나중에 꼭 김책시에 함께 가자고. 그곳에 가서 ‘○○가 고향을 정말 그리워했노라’고 전해주자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지도를 폈다. 김책시는 정말 바다에 붙어있는 도시였다. 여행을 권하는 TV광고에 홀려 크로아티아를 걷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북한은? 상상력이 완전히 막혀있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 갑자기 김책시의 해안가를 거닐어보고 싶어졌다. 주 박사가 인터뷰 말미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남한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는데요, 여기는 풍광 좋은 곳들은 다 부자들이 차지했어요.” 북쪽 땅을 거니는 그날은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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